[인터풋볼] 서재원 기자= 한국 선수들의 활약으로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러나 우리가 EPL을 볼 수 있는 부분은 TV 위성 중계에 잡힌 모습이 전부다. 두 시즌동안 모 일간지 EPL 현지 통신원 역할을 수행한 필자의 경험을 통해, TV에서는 볼 수 없는 EPL 뒷이야기를 매주 '서재원의 EPL通'에서 풀어내고자 한다.[편집자주]

레스터 시티의 동화 같은 이야기가 완성됐다. 마치 21년 전 블랙번 로버스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레스터는 지난 3일(이하 한국시간) 영국 런던에 위치한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열린 토트넘과 첼시의 2015-16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36라운드 경기 결과(2-2)에 따라 우승이 확정됐다. 두 경기가 남았지만 승점 77점으로 2위 토트넘을 승점 7점차로 따돌렸다.

레스터의 동화는 해피엔딩이었다. 레스터와 레스터의 팬들에겐 평생 잊지 못할 순간이고, EPL 역사에도 전설로 기록될 이야기다. 1884년 창단된 이후 절반 이상의 시기를 하위리그에서 보냈던 레스터는 132년 만에 그 결실을 맺었다.

# 영국의 작은 도시, 우승컵을 가져간 4번째 도시가 되다

레스터의 기적적인 우승은 EPL 역사를 한순간에 뒤엎었다. 무엇보다 지난 20년간 런던과 맨체스터, 두 도시만이 가져갔던 우승컵이 영국 중부지방에 위치한 한 도시의 품에 안겨졌기 때문이다.

1992-93 시즌을 시작으로 출범한 EPL에서 지금까지 가장 많은 우승컵을 가져간 지역은 맨체스터였다. 맨체스터는 EPL 출범 첫 회, 맨유의 우승을 시작으로 2년 전 맨체스터 시티의 우승까지 총 15회(맨유: 13, 맨시티: 2)나 우승팀을 배출했다. 그 다음은 런던으로, 7차례(아스널: 4, 첼시: 3) 우승팀이 나왔고, 블랙번(1회)까지 3개 도시만이 우승을 경험했다. 그러나 레스터의 우승으로 레스터시는 우승팀을 배출한 4번째 도시로 기록됐다.

레스터는 영국 내에서도 그리 주목받지 못한 도시다. 인구 약 33만 명, 인구수로만 보면 영국 내 16번째에 해당하는 도시다. 영국 내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지만, 보즈워스 전쟁 박물관 및 공원, 레스터 대성당 등을 제외하곤 특별히 내세울 게 없는 도시였다. 필자도 영국에서 거주했던 약 1년 반의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가볼 생각조차 못한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레스터는 EPL 우승팀을 배출한 도시가 됐고,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도시로 떠올랐다. 현지에 거주하는 필자의 지인에 의하면 “현재 레스터 도시 전체는 축제 열기로 가득하다. 레스터로 축구 여행을 가려는 사람들의 문의도 늘고 있다”고 전했다. 레스터에 ‘레스터 시티’와 ‘킹파워 스타디움’이란 새로운 명소가 생긴 것이다.

다른 도시, 다른 팀들의 팬들도 레스터의 기적과도 같은 우승을 축하했다. 30년 가까이 리버풀을 응원하고 있는 필자의 친구 가레스 안소니(42, 카디프)는 “EPL 팬 입장에서 소규모 팀, 빅머니 팀들을 대신해 우승하는 것은 매우 좋은(건강한) 일이라 생각한다. 토트넘 팬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레스터를 축하하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해줬다.

이어 필자의 과거 플랏메이트이자, 첼시의 시즌권 보유자인 헥터(31, 런던)는 “정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시즌이었다. 레스터의 우승은 그 누구도 생각 못한 일이다. 디펜딩 챔피언 첼시가 유럽대항전에 진출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레스터가 우승했다고 그들을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이는 없다”고 말했다.

# 21년 전엔 블랙번의 기적이 있었다?

영국의 변방에서 한 순간에 축구의 중심 도시로 주목받고 있는 레스터. 그러나 이러한 기적은 EPL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21년 전, 블랙번의 우승도 레스터 못지않게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현재의 레스터도 그들과 비교되고 있다.

지금은 잊혔지만, 블랙번은 21년 전, EPL 정상에 올랐다. 그들은 EPL 출범 세 번째 시즌인 1994-95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독주를 막고 우승을 차지한 것으로 유명하다. 물론 블랙번의 우승이 레스터처럼 구단 최초 우승은 아니었다. 블랙번은 과거 1911-12 시즌과 1913-14 시즌에 이미 우승을 경험한 바 있다. 다시 정확히 말해 81년 만에 우승이었다.

블랙번은 지금의 레스터가 승격 2년 만에 우승한 것처럼 승격 후 얼마 안 있어 EPL 정상에 올랐다. 애초에 우승후보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블랙번은 EPL 출범 직전인 1991-92 시즌, 디비전2(2부 리그, 현재 챔피언십 격)에서 6위를 차지한 후 플레이오프를 통해 1부에 올랐고, EPL 출범 첫해를 함께했다.

당시 블랙번은 승격 직후부터 파란을 일으켰다. 케니 달글리시 감독의 지휘 하에 승격 첫 시즌 만에 4위에 올랐고, 두 번째 시즌엔 2위, 세 번째 시즌에 정상에 올랐다. 물론 그 과정은 다르지만, 분명 지금의 레스터만큼이나 충격적인 행보였다.

# 우승 후 몰락한 블랙번...레스터의 운명은?

이제 레스터의 우승은 어쩌면 과거로 기억될 수 있다. 과거 블랙번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현재 레스터를 걱정하는 시선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1년 전, 블랙번은 우승 직후 급격히 흔들렸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우승에 오랫동안 취했고, 변화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달글리시 감독은 우승 후 지휘봉을 수석코치였던 레이 하포드에게 물려줬고, 다음 시즌을 대비해 단 두 명의 선수만 영입하는 안일한 모습을 보였다. 우승의 주역이었던 앨런 시어러는 4일 영국 ‘데일리 메일’과 인터뷰에서 “우승 직후, 팀을 떠나야할 시간임을 정확히 알게 됐다”고 당시 블랙번의 분위기에 대해 설명했다.

결국 블랙번은 우승 다음 시즌을 7위로 마쳤다. 그 후 시어러는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했고, 블랙번은 우승 후 4번째 시즌인 1998-99 시즌을 19위로 마치며 강등됐다. 이후 블랙번은 두 시즌 만에 EPL로 다시 승격했지만 과거 챔피언의 모습을 찾을 순 없었고, 주로 하위권을 맴돌다 2011-12 시즌 다시 강등돼 현재 챔피언십에 머물러 있다.

레스터도 같은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크다. 우선 리야드 마레즈, 제이미 바디, 은골로 캉테 등 우승 주역들을 지키는 게 급선무다. 이미 수많은 빅클럽들이 그들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라니에리 감독도 4일 ‘스카이스포츠’와 인터뷰에서 “우리 선수들을 모두 지키고 싶다. 이적을 원하는 선수가 있다면 붙잡을 것이다”고 걱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스카이스포츠'의 축구전문가 폴 머슨도 5일 "바디는 남을 수 있지만, 마레즈와 캉테는 팀을 떠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지켜도 문제다. 올 시즌 라니에리 감독은 정형화된 베스트11으로 한 시즌을 이끌어왔다. 라니에리 감독은 약 5~6명의 선수를 영입할 거란 계획을 말했지만 슈퍼스타는 필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그의 인터뷰를 종합해보면, 현재의 틀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21년 전, 블랙번도 자신들의 스타일을 유지하려다 무너져 내렸다. 그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팀들이 그에 대해 철저히 준비했던 결과였다.

레스터의 기적과도 같은 우승은 블랙번처럼 잊힐까, 아니면 또 다른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갈까. 벌써부터 그 미래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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