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풋볼] 2012년은 제주유나이티드가 창단된 지 꼬박 30년이 되는 해다. 프로축구 출범이 임박했던 1982년 12월 유공 코끼리라는 이름으로 탄생했다. 국내 프로축구팀 1호는 할렐루야지만 지금은 내셔널리그팀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제주유나이티드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프로구단이다. 는 그동안 수 많은 축구 스타를 배출하고 한국 축구의 저변 확대에 힘을 써온 제주유나이티드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는 코너다.

1992년은 한국프로축구 탄생 1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한 해였다. 태동기를 거쳐 성장기에 접어들면서 1세대 선수들과 지도자들이 대거 물러났고 신인왕을 차지한 홍명보와 독일에서 귀국해 감독 2년차를 맞이한 차범근 등 2세대 축구인들이 주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공 역시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10여 년 동안 팀을 이끌었던 김정남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령탑에서 물러난 것. 1992시즌 개막 후 7경기에서 1승 6패로 최하위로 추락한 유공은 김정남 감독을 총감독으로 승격시켜 벤치에서 물러나게 하는 한편 함흥철 고문과 박성화 코치를 중심으로 팀을 새롭게 재편했다.

유공과 국가대표팀을 오가며 지도력을 인정 받았던 김정남 감독은 1989년 팀 역사상 첫 우승을 가져다준 명장이었지만 성적 부진과 함께 오랜 감독 생활에 지친 모습을 보였다. 이에 유공은 감독 교체라는 고강도 카드를 내밀 수 밖에 없었다.

김정남 감독 퇴진에도 유공은 이렇다 할 반전을 꾀하지 못했다. 특히 수비 붕괴는 성적 부진을 부채질했다. 도움왕 신동철을 비롯해 황보관, 노수진이 선전한 공격진은 총 33골을 기록하며 현대(38골)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득점을 터트렸지만 이를 상회하는 38실점을 내주며 부진을 면치 못했다. 수비 축구의 대명사로 불렸던 유공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무엇보다 1989년 우승의 주역이자 3년간 유공의 수비를 이끌어온 폴란드 출신의 테드가 떠난 빈자리가 컸다. 수비의 또 다른 축인 최윤겸 역시 잦은 부상으로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많았다. 뷔펙과 프로 3년차 허기태가 분전했지만 3골 이상 내준 경기가 시즌 중 7번이나 있었을 정도로 유공의 수비 붕괴는 심각했다.

결국 유공은 7승 8무 15패라는 참담한 성적으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팀 창단 이후 최악의 성적이었다. 새롭게 신설된 아디다스컵에서 초반 선두를 질주하며 돌풍을 일으켰지만 사리체프의 맹활약으로 막판 뒤집기에 성공한 일화에게 승점 1점차로 우승컵을 내줘야 했다. 노수진이 6골을 터트리며 득점왕을 차지했지만 수비 불안과 함께 막판 연패를 당한 게 실패의 원인이었다.

글=이경헌 기자

사진=제주유나이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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