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풋볼] 지금 한국 축구 팬들의 모든 시선은 2018 러시아 월드컵으로 향해 있다. 그래서 축구 전문 언론 '인터풋볼'이 전혀 다른 축구 이야기를 준비했다. 바로 '김혼비의 우먼피치.' 이 새로운 이야기는 일반적인 기사문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한 여성 축구 팬이 직접 축구를 하며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생생한 필체로 그려낸다. 이제 또 다른 시선에서 축구를 즐길 시간이다. [편집자주]

# 명감독의 명작전, 공격과 수비를 잘하자!

시합 날 아침. 비가 올 거라고 해서 내심 기대했는데(어차피 전력 차가 난다면 약팀 입장에서는 ‘비’라는 변수에 기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잔뜩 흐리기만 했다.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본부석으로 가서 선수등록을 했고, 출전하지 않는 선수들은 스탠드 한쪽으로 짐을 옮겼다. 모두들 낮게 깔린 납빛 하늘 같은 얼굴이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감독님이 선수들을 불러 모아 포지션을 정해 주었다.

“저 팀이 우리보다 나은 게 있다면 선출이 두 명 더 많다는 것뿐이에요. 근데 이 두 명이 아마추어 경기에서 얼마나 큰지 알고 있죠? 우리 팀보다 공격력이 네 배 세다고 보면 돼, 네 배. 그걸 얼마나 잘 막는지가 오늘 경기의 관건이라는 소리예요. 물론 공격도 잘해야 되구요. 알겠죠? 자, 그럼 힘내서!”

에? 이게 끝이에요? 요약하면 그냥 ‘수비도 잘하고 공격도 잘하자’란 말이잖아? 작전이 너무 해맑은 거 아니냐고 생각하고 있는데 다행히 주장이 선출인 승원이와 지경이를 따로 불러(금미는 집안 사정으로 이번에 나오지 못했다) 무언가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아마추어 경기는 결국 선출들의 역량 싸움이다. 선수 시절 포지션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선출들이 수비도, 공격도, 하다못해 골키퍼를 맡겨도 월등히 잘한다. 그래서 이들을 수비와 공격 모두에 최대한 활용해야 하는데, 이때 많이 쓰는 전술이 오버래핑이다.

오버래핑overlapping은 후방에 배치되어 있는 수비수가 공격 지역으로 달려 나와 공격에 가담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수비수가 잠시 공격수가 되는 것이다. 실력도 활동량도 탁월한 선출들은 공격수 자리에 고정시켜 놓는 것보다 수비를 기본으로 하다가 때때로 공격에 가담하는 것이 훨씬 팀 전력에 도움이 된다. 생각해 보면 감독님의 해맑은 전술 ‘수비도 잘하고 공격도 잘하자’가 곧 오버래핑 정신의 구현인 것이다! (물론 감독님이 그걸 의도하고 말했을 리는 절대 없다.)

“야, 니네 좋은 자리 잘 맡아 놨네? 여기 좀 앉는다~”

스탠드 쪽이 소란해지는가 싶더니 열 명쯤 되는 여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응? 누구지? 유니폼이 아닌 사복 차림이라 알아보는 데에 몇 초 걸렸지만 앗, 그렇다! FC페니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저기, 저 부어있는 윗입술!

“쟤네 대체 왜 왔지? 야! 니들 왜 왔냐? 토요일에 할 일이 그렇게 없냐?”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주장이 스탠드를 향해 소리쳤다.

“왜 왔긴. 니들 박살나는 거 보면서 비웃어주려고 왔지. 놓치기 아깝잖아.”

“뭐야?!”라며 주장이 눈을 부라리는데 심판이 집합 휘슬을 불었다.

“약 오르면 잘해보시든가~ 야야, 얼른 들어가. 심판이 부르잖아.”

우리 팀 선수들은 도끼눈이 되어 그들을 노려보다 경기장으로 들어갔고, FC페니 선수들은 싱글싱글 웃으며 우리 팀 간식 중 빅파이 박스를 들고 가 나눠 먹기 시작했다.

“저 진상들...”

허벅지 부상으로 이번 대회에는 응원만 하러 온 우리 팀 주전 미드필더 오주연이 내 옆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어수선한 가운데, 경기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시작 5분 만에 알 수 있었다. FC마리케는 강했다. 정말 강했다. 이렇게 거대한 파도 같은 팀은 처음이었다. 한 번씩 휘몰아칠 때마다 우리 팀 선수들의 체력과 영혼이 깎여나가는 느낌. 국가대표 출신이라는 5번과 9번이 양쪽 측면을 오버래핑으로 휘저을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쓸려나갔다. 최후방 수비수인 21번은 어느 샌가 우다다다 달려와서 어마어마한 힘으로 슈팅을 날렸다. 우리 팀 선수들이 FC마리케의 공격수와 5번, 9번에게 온 신경을 쏟느라 수비수의 존재를 잠시 잊어버리는 그 찰나의 틈을 비집고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다. 전반에 2골을 실점했다. 사실 2골만 먹은 것도 정말 잘한 것이다.

하프타임, 다들 잔뜩 풀이 죽어 자리로 돌아왔다. 눈이 풀린 정도나 흐느적대는 모양새가 평소의 다섯 배는 지친 것 같았다. 물통 뚜껑을 열어 언니들에게 건네주고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FC페니 선수들이 스탠드에서 내려와 몰려왔다.

“야, 공격수들, 니네 쫄았냐? 왜 평소만큼도 못하는데? 니네 수비 지금 되게 잘하고 있어. 진짜 짱이야. 수비 믿고 확확 앞으로 질러야지!”

“승원! 너 정실언니가 맨투맨하러 자리 비우면 가서 매워줘야지. 거기서 자꾸 뚫리잖아.”

“어휴, 시끄러워! 왜 부르지도 않았는데 와서 감독질이야, 감독질이!”

“아, 속상하니까 그렇지! 좀만 더 기운을 내보란 말야!”

“너네 말 들으면 있던 기운도 날아가거든?”

저쪽에서 해맑게 빅파이를 먹고 있던 감독님이 슬슬 입가를 털며 다가올 때까지 두 팀은 또 으르렁댔다. 하지만 스탠드에 같이 있던 우리 후보들은 잘 알고 있었다. FC페니가 전반 내내 얼마나 분통을 터트리며 속상해했는지를. 처음에는 웃고 까불고 은근히 약도 올리며 경기를 보던 그들이었는데 첫 골을 실점하는 순간 “으휴~ 뭐야. 우리 앞에선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뭐 저리 매가리들이 없어!”라며 탄식 섞인 짜증을 낸 것을 시작으로, 수비수와 볼을 다투던 승원이가 상대 팔꿈치에 찍혀 비명과 함께 나뒹굴 때 제일 먼저 벌떡 일어난 것도, 심판에게 승원이 찍어 내린 선수 옐로카드 왜 안 주냐고, 심판 똑바로 안 보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항의한 것도, 힘들게 얻은 프리킥을 차는 주장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외친 것도 FC페니 선수들이었다. 하프타임 내내 으르렁대다 나가긴 했지만 경기를 뛴 우리 팀 선수들도 아마 다 알고 있을 것이다.

후반이 시작되고, 남은 빅파이를 탐색하러 온 FC페니 주장에게 “그래도 우리가 지니까 속상하신가 봐요?”라고 슬쩍 말을 던져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정색하면서 “아니! 니네 얄밉고 너무 싫거든! 근데 까도 우리가 까야지 다른 데서 까이고 있는 거 보니까 이건 또 짜증나네? 니네 왜 다른 데 가서 처맞고 다니냐? 기도 팍 죽어가지고! 어휴, 꼴보기 싫어, 진짜!” 하고 또 화를 버럭내는 게 아닌가. 나는 내 발뒤꿈치에 놓여 있던 빅파이를 발견하고는 박스 채로 건네주었다.

# 나도 할 거야, 오버래핑

FC마리케는 후반에도 거칠 것이 없었다. 2대 0으로 이기고 있으니 전반보다는 수비에 치중하지 않을까 했는데(이게 하프타임 때 감독님이 한 유일한 예상이자 우리팀의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여전히 호쾌하게 그러나 날카롭게 공격했다. 그렇다고 수비가 느슨한 것도 아니었다. 21번은 오버래핑뿐만 아니라 수비진 지휘도 탁월해서 어쩌다 우리 팀이 역습 기회를 잡아 공을 치고 올라가면 그녀의 목소리가 닿는 곳마다 수비수가 나타나 철컥철컥 공간을 잠갔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점수는 0대 4. 전반에 소진한 체력이 후반에 발목을 더 잡았다. 하지만 다들 포기하지 않고 분투하고 있었다. 승원이는 전반에 두 골을 넣은 21번을 아득바득 따라다니면서 후반 내내 꽁꽁 묶어놓다가 급기야는 다리에 쥐가 나서 잠시 경기장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갔고, 주장은 그야말로 온몸을 허공에 내동댕이쳐서 결정적인 두 골을 막아냈다. 최고령 주복언니의 슬라이딩 태클은 숨은 백미였다. 그렇게 종료까지 5분여를 남겨 놓았을 때쯤, 갑자기 FC페니의 주장이 벌떡 일어났다.

“야, 너희들 그래도 한 골은 넣고 져야 할 거 아냐! 안 부끄럽냐! 다섯 골 더 먹더라도 한 골은 넣고 끝내자고!“

목소리가 피치 위를 쩌렁쩌렁 울렸다. 다른 FC페니 선수들도 일어나 “그래, 한 골 넣자!”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순간, 피치 위를 감싸고 있던 후덥지근한 공기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듯하더니 우리 팀 선수들의 눈빛에 무언가 반짝이기 시작하며 대역전의 서막이 열렸다, 같은 건 스포츠 만화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다. 그런 일도 다 체력이 받쳐 줘야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다들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었고 결국 막판에 한 골을 더 실점했다. 종료 휘슬과 함께 최종 스코어 0대 5. 이번 대회 첫 게임이자 마지막 게임이 끝났다. 여기까지였다.

일렬로 서서 관중석에 인사하는 선수들에게 내가 보낼 수 있는 가장 크고 열렬한 박수를 보냈다. 슬쩍 옆을 보니 FC페니 선수들도 어쩐지 시큰해 보이는 눈빛으로 열심히 박수를 치고 있었다. 아, FC마리케 정말 대단했다. 거기에 맞선 우리 팀도 대단했다. 지금까지 본 우리 팀 플레이 중에 가장 멋졌다. 이런 게 연습경기와 공식경기의 차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FC마리케가 아무리 무서웠대도 이날의 가장 인상적인 오버래핑은 누가 뭐래도 FC페니에서 나왔다. 연습시합 때는 늘 우리가 골을 넣지 못하게 가로막던 수비수들이었는데 오늘은 우리와 함께 공격에 나서 주었다. 그것도 우리 팀 후보들보다 훨씬 더 호들갑스럽게. 아니, 애초에 자기 팀 경기도 아닌데 토요일 아침부터 한 시간 넘는 거리를 달려온 것부터가 오버..., 아니 오버래핑 아닌가.

그리고 이제 막 내 마음속에서도 오버래핑이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축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목표 비슷한 게 생겼다. 열심히 인사이드킥을, 아웃사이드 드리블을, 턴을, 트래핑을, 리프팅을 연습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뿌듯했던 내게 ‘나도 저기서 뛰고 싶다’ ‘나도 얼른 진짜 시합에 나가고 싶다’라는 생각이 스쳐간 것이다. 솔직히 그동안 연습경기든 공식경기든 축구 시작한 지 반년도 안 된 나에게는 우리 팀 일이면서도 남의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내가 저 자리에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게 된 것이다.

물론 갈 길이 멀다. 입단 2~3년차 중에도 아직 실력이 못 미쳐 경기에 나가지 못한 선수들이 있으니까. 현재 그들은 나보다 훨씬 잘한다. 그러니까 저기서 뛰려면 가장 맨 뒤, 그것도 수십 발자국 뒤에야 겨우 서있는 내가 전력으로 뛰어서 몇 사람이나 추월해야 한다. 이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거대한 오버래핑일 것이다. 잘하고 싶다. 정말 잘하고 싶다.

경기가 끝나고 FC페니 선수들이 점심을 사줬다. 무려 고기였다. 식당에서까지만 해도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 앞에서 오늘 5차까지 가보자며 화기애애했는데(여기까지 보고 난 집에 갔다), 2차로 간 호프집에서 지난 연습시합 이야기를 하다가 또 대판 싸웠다고 한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언니들의 분노가 대단했는데, 오늘 오전, 우리 팀 게시판에 공지가 하나 올라왔다.

”6월 26일 11시, FC페니가 〇〇시에서 16강전을 한다고 합니다. 응원 가실 분들은 참석 댓글 달아 주세요.“

“내비 찍어보니까 1시간 40분 걸리던데?” ”뭐 그렇게 멀리서 해? 귀찮아 죽겠네”라고 투덜거리는 댓글들이 속속 올라왔지만 그 글의 끝에는 대개 “참석”이 달려있었다. 결국 과반이 넘는 인원이 가기로 했다. 정말 못 말린다. 나? 물론 참석이다. 9번 선수를 응원하기 위해서. 단, 나 때문에 그날따라 9번 선수가 갑자기 선발에서 제외되거나 하지 않아야겠지만 말이다. 바우르다르붕가 화산도 잠잠했으니까 괜찮겠지, 뭐.

글=김혼비(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저자)

[저자의 말] 평범한 여자들도 축구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곳곳에서 축구에 푹 빠진 여자들이 열렬히 축구를 하고 있다. 해외축구와 K리그를 보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다가 급기야 덜컥 아마추어 여자축구팀에 입단, 지금은 축구를 직접 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는 김혼비의 생애 첫 축구도전기이자 축구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피치 위에 더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새겨지기를 바라며.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여자들의 더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곧 단행본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2018년 6월, 민음사)로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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