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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혼비의 우먼피치] 오버래핑: 어쩌자고 여기까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까지①

[인터풋볼] 지금 한국 축구 팬들의 모든 시선은 2018 러시아 월드컵으로 향해 있다. 그래서 축구 전문 언론 ‘인터풋볼’이 전혀 다른 축구 이야기를 준비했다. 바로 ‘김혼비의 우먼피치.’ 이 새로운 이야기는 일반적인 기사문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한 여성 축구 팬이 직접 축구를 하며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생생한 필체로 그려낸다. 이제 또 다른 시선에서 축구를 즐길 시간이다. [편집자주]

# 에이스가 쓰러지자 일어난 일

전반부터 불안 불안 하더니 결국 후반 종료 4분 전에 승원이가 얼굴을 감싸고 나뒹굴었다. 우리 팀 선수들도 놀라고 상대 팀 선수들도 놀랐지만 누구보다 놀란 건 주장이었다. 주장은 최종 수비라인에서 승원이가 쓰러져 있는 중앙선까지 단숨에 달려오는 도중에도 상대팀 9번 선수에게 고함을 쳤다.

"언니, 애 죽이려고 그래요? 왜 공도 안 갖고 있는 애를 괜히 가서 들이받아?"

"일부러 그런 거 아냐. 나도 멈추려고 했는데…….“

”일부러가 아니긴 뭐가 아냐! 오늘 너랑 쟤랑 계속 애들 밀치고 차잖아!“

정실 언니의 괄괄한 목소리가 피치 위로 쏟아져 모두의 목소리를 덮었다. 상대 팀인 FC페니가 이날따라 유독 거칠기는 했다. 우리 팀과 가장 자주 연습시합을 뛰는 팀이라 스타일을 뻔히 아는데 확실히 평소보다 불필요한 몸싸움도 많았고 위험한 태클도 많았다. 후반 시작하자마자도 그랬다. 정실 언니가 '쟤'라고 가리켰던 선수에게 지경이가 다리를 차여 주저앉는 바람에 경기가 잠시 중단됐었다. 그리고 경기가 재개된 지 얼마 안 돼서 또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경기장 바깥에서 리프팅 연습을 하고 있던 내 눈에도 솔직히 방금 전 상황은 일부러 그런 것 같진 않았다. 승원이에게 달려가던 9번 선수의 눈빛과 몸짓에 특별히 사악한 의도는 없어 보였고, 오히려 이미 붙어 버린 가속도를 어쩌지 못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몸을 틀어 피해보려는 기색이 느껴졌었다. 결국 충돌을 피할 수 없었지만. 9번 선수도 꽤나 아팠을 것이다. 아까부터 계속 부딪힌 앞니를 흔들어보기도 하며 입을 감싸 쥐고 있다.

다행히 승원이는 눈썹 위가 살짝 찢겼을 뿐이었다(피치 위에서는 근육, 힘줄, 뼈, 연골을 다친 게 아니면 일단 ‘다행히’로 퉁친다). 이 정도로 일단락되나 했는데 돌아서려던 주장이 승원이의 손등에서 뭉개진 핏자국을 발견했다. 피가 나는 줄 모르고 상처 부위를 비빈 모양이다. 이런 격앙된 분위기에서 팀의 에이스가 흘린 몇 방울의 피는 사그라드는 불씨 위에 뿌려진 몇 방울의 휘발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주장은 다시 ”야이씨!“하며 활활 타올랐고 분위기는 다시 뜨겁게 달아올랐다.

“경기 중에 다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치사하게 왜 트집이야, 오늘따라.”

“우리가 지금 이거 하나만 갖고 이래? 니네 오늘 내내 경기 더럽게 했잖아!”

“유난 좀 작작 피워~ 승원이만 다쳤어? 우리 정희도 입 다쳤다고!”

“어이구, 그러셔? 그러면 너희는 입 닥쳐.”

“뭐라구요? 이 언니들이 정말!”

40대 언니들이 험악한 표정으로 이런 유치원 어린이들 같은 말을 주고받고 있는 걸 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와중에 정작 승원이와 9번 선수는 서로의 다친 부위를 살펴보며 걱정의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승원이의 눈썹 위를 찢어지게 만든 9번 선수의 앞니는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흔들리는 듯했고 윗입술은 그새 눈에 띄게 부어올랐다.

그 광경을 보고 나는 9번 선수가 좀 좋아졌는데, 사실 아까처럼 충돌한 상대 선수가 쓰러져 뒹구는 상황에서 프로든 아마추어든 가장 하기 좋은, 그래서 많이들 하는 선택은 같이 비명을 지르거나 신음을 토하면서 쓰러져 뒹구는 것이다. 특히 자기가 잘못한 상황에서는 더욱. 누워서 뒹굴면 곧 날아들 비난의 화살을 가만히 서서 다 맞지 않아도 되고, 약간의 동정표도 살 수 있고, 경기 중에 합법적으로(?) 누워서 쉴 수도 있다. 최소한 쓰러져 있는 선수 옆에 멀뚱하게 서 있어야 하는 뻘쭘함이라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9번 선수는 험한 길을 선택했다. 표정과 행동에서 보이는 어정쩡함으로 보건대 용감하게 그 길을 택했다기보다는 사실 드러눕고 싶었는데 그럴 타이밍을 놓친 것 같긴 하지만... 그렇다고 승원이에게 선뜻 다가가 괜찮냐고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내가 지금 매우 걱정하고 있다’를 과장되게 어필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승원이 상태가 걱정되니 그 옆을 떠나지도 못하고(몰려든 사람에게 한마디씩 욕 더 먹기에 딱 좋은 위치였다), 자기도 되게 아픈데 아프다는 말도 못 꺼내고...

그러니까 뭔가 여러 차례 자기방어를 시도할 포인트들이 있었는데 하나도 하지 않았다. 아... 이 언니, 잘은 모르지만 왠지 어디 가서 요령 없이 손해 보고 마는 성격일 것 같아... 나 이런 타입에 매우 약한데... 하지만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벤치로 걸어 들어가는 9번 선수의 등에 대고 “다음 주 대회인거 뻔히 알면서 꼭 애 다치게 하고 싶었어요?!”라고 굳이 싸움을 다시 거는 주장을 억지로 끌다시피 해서 벤치로 데려간 것뿐이었다.

주장의 말대로다. 다음 주에 큰 대회가 있다. FC페니도 나간다. 그래서 모두 이렇게 예민하다. 평소보다 눈에 띄게 경기가 거칠고, 일부러 하지 않은 파울도 그렇게 볼 만큼. 우리 팀은 해마다 크고 작은 대회를 서너 개 정도 나간다고 하는데 개중에서도 다음 주 대회는 꽤 중요한 모양이다. 대진 발표 이후부터 팀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져서, FC페니 직전 연습경기를 한 시니어 팀 선수들이 “너희들 곧 대회 있냐?”라고 눈치 챘을 정도다.

# 장날의 주문, 바우르다르붕가

2주 전에 대진 추첨이 있었다. 훈련을 마치고 추첨 결과를 전해들은 팀원들은 그 자리에서 5분간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감독님이 재작년, 작년 2년 연속 우승에 빛나는 FC마리케를 토너먼트의 첫 경기 상대로 뽑아온 것이다. 26개 팀 중에 하필 그걸.

지금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웃을 수 있는 시간인 양 한참을 배를 잡고 웃던 언니들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가시며 초조함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감독님은 자신의 뽑기 실력이 가져온 참담한 결과를 조금이나마 만회하려는 듯 “어차피 우승하려면 만나야 할 팀이잖아요?”라고 했다가 “어차피 우리가 우승하려던 팀은 아니잖아요?”라고 쫑크를 먹었고 “그렇네요...”라며 씁쓸히 웃더니 “전 그럼 다음 수업이 있어서 이만...” 이라며 허둥지둥 사라졌다. 최근 몇 년 동안 추첨운 좋기로 우리 팀 따라올 팀이 없었는데 올해는 시작부터 왜 이럴까라는 누군가의 푸념에 지경이가 “작년이랑 달라진 점은 혼비 언니 들어온 거 하난데, 언니 때문인 거 아니에요?”라고 농담을 던졌고, 그 농담을 구조선 삼아 몇몇 언니들이 “맞네! 혼비 책임이네!” “그래, 이건 그냥 혼비 때문인 걸로 하기로!”라며 저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분위기를 끌어올리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원래 팀의 신입이란 게 이런 위기에서 분위기 반등을 위한 실없고 무해한 농담의 소재로 쓰이기 마련이란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약간 뜨끔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나에게는 가는 날이 장날인, 일명 ‘장날의 법칙’이 진짜로 있기 때문이다. 마트에서 내가 찾는 물건만 똑 떨어져 있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고, 벼르고 찾아간 식당이 개인사정상 갑자기 오늘만 쉰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는 건 친구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도 못 되고, 유독 좋아하는 과자는 몇 년 만에 생산 중지, 좋아하는 아이돌은 최단 기간 해체, 응원하는 K리그 팀 유니폼을 사서 좋아하는 선수 등번호와 이름을 마킹하면 그 선수는 그 다음해 꼭 팀을 떠나는 식이었다.

정점은 2014년 아이슬란드로 신혼여행지를 확정하고 모든 예약을 다 마치고 난 얼마 후였다. 심상찮은 뉴스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이슬란드의 바우르다르붕가 화산(이 생소한 이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이 대규모 폭발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높은 확률로 그달 중에 터질 것이라고 했다. 주민과 관광객 몇백 명이 대피했고, 항공업계의 최고 수위 경보인 적색경보가 내려졌다. 무려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영공을 폐쇄했던 2010년 유럽 항공대란을 떠올려 보면(그때의 원인도 아이슬란드의 화산 폭발이었다), 신혼여행을 가는 것은 무리수로 보였다.

화산의 나라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거대한 화산이, 1910년에 마지막 분출을 했었다는 화산이, 104년 만에 갑자기, 그것도 결혼 한 번 해보겠다고 잡아놓은 날짜 언저리에 재분화를 시작했다는 이 믿기 어려운 소식에 매일매일 아이슬란드 항공 운항정보 사이트를 새로고침하며 저 먼 나라의 화산 상태를 세계의 지질학자들 다음으로 주시하고, 화산 폭발 시기 예측에 대해 세계의 지질학과 1학년 1학기 학생들만큼 공부하고 있던 내게 친구들은 “니가 기어이 화산까지 움직이는구나” “이런 마그마 같은 년ㅋㅋㅋㅋㅋ” 따위의 문자들을 보내왔다. 다행히(?) 신혼여행을 가기 전에 폭발이 일어났고 인명 피해를 내거나 여행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규모가 아니라서 별 탈 없이 다녀오기는 했지만 이쯤 되면 진짜 우공이화산 수준이다. 그러니 팀원들이 “이번 대진 혹시 혼비 때문인 거 아냐?”라는 오컬트적 의심이 다분한 농담을 건네면 아주아주 조금은 복잡한 심정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지난주엔 작년 3위 팀과 가졌던 연습경기에서 그야말로 ‘개박살’이 났다. 2대 7. 팀원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자신감은 더욱 꺾였다. 이런 타이밍에 이번 대회에서 부전승 자리를 뽑아 이미 16강에 올라가 있어 더욱 얄미운 FC페니와 이렇게 싸움이 붙게 된 것이다.

싸움은 점점 뜨겁게 달아오르다가 바우르다르붕가 화산처럼 폭발해서 급기야는 “승원이가 있으나 없으나 어차피 니네 수준으로는 FC마리케한테 처발릴걸?” “응. 니네처럼 개발로 축구하는 팀이랑 자꾸 같이 뛰다 보니 그렇게 됐네? 수준 이하 팀이랑은 다시는 축구 안 하려고.” 같은 인신모독으로 이어지다가 양 팀 주장 둘이 나란히 스케줄표를 들고 서서 다음 달까지 잡혀있는 양 팀 간의 연습경기 일정들을 다 취소해버리는 것으로 끝났다. 아직 경기 시간이 4분 남아 있었던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심판 봐주던 시니어팀 코치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자기 팀으로 돌아가 가방을 싸고 있었다) 다들 짐을 챙겨 흩어졌다.

된장찌개와 제육볶음을 앞에 둔 점심시간. 몇몇 언니들이 “그래도 얘네랑 나눈 시간들이 얼만데”라고 감상에 젖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 반주가 몇 잔 돌고 나니 FC페니를 향한 격렬한 성토가 이어졌다. 근 몇 년간 FC페니와 연습경기 하다가 부상당했던 경험들이 즉석에서 연대기별로 정리되었고, 그들의 거친 파울에 대한 제보가 속출했으며, 작년 여러 대회들에서 우리 팀이 4강 문턱에 가보지 못한 것도 FC페니의 느슨하고 수준 낮은 수비에 길들여지는 바람에 압박 잘하는 팀에 대처를 못했기 때문, 며칠 전의 2대 7 참사도 FC페니 때문, 이번 대진운도 FC페니 같은 재수 없는 팀이랑 엮였기 때문이라고 명쾌하게 결론이 났다. 이런 기세라면 총무언니네 애들 성적 떨어진 것도, 정실언니네 가게 매출 떨어진 것도 분명 FC페니 때문일 것이었다. 이게 사실이든 아니든(차라리 김혼비 때문에 화산이 폭발했다는 말이 더 신빙성 있을 지경이지만) 결론이 이렇게 난 이상, FC페니의 저주를 끓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기필코 FC마리케를 꺾고 16강에 가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가능할까? 2년 연속 챔피언을 상대로?

글=김혼비(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저자)

[저자의 말] 평범한 여자들도 축구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곳곳에서 축구에 푹 빠진 여자들이 열렬히 축구를 하고 있다. 해외축구와 K리그를 보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다가 급기야 덜컥 아마추어 여자축구팀에 입단, 지금은 축구를 직접 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는 김혼비의 생애 첫 축구도전기이자 축구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피치 위에 더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새겨지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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