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풋볼] 지금 한국 축구 팬들의 모든 시선은 2018 러시아 월드컵으로 향해 있다. 그래서 축구 전문 언론 ‘인터풋볼’이 전혀 다른 축구 이야기를 준비했다. 바로 ‘김혼비의 우먼피치.’ 이 새로운 이야기는 일반적인 기사문이 아닌 지극히 평범한 한 여성 축구 팬이 직접 축구를 하며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생생한 필체로 그려낸다. 이제 또 다른 시선에서 축구를 즐길 시간이다. [편집자주]

# 여자축구팀의 영업 비밀

축구를 시작하고 나서 가장 놀랐던 것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여자들이 전국 곳곳에서 축구를 엄청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많은 여자들이 이렇게 열심히 축구를 하는데 왜 그동안 남자 조기축구 선수들만 눈에 띄었던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다음으로 놀랐던 것은 경기하면서 오며 가며 마주쳤던 많은 선수들 중에 정작 축구팬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국가대표 축구에도, 해외축구에도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그러니 당연하게도 K리그 팬은 더더구나 없었다. “사촌오빠가 강원FC 팬이었던 것 같다”는 다른 팀 부주장 언니의 애매한 답이 그나마 가장 근사치였다(진짜 대체 다들 어디 있어요?). 가끔 WK리그(국내 여자축구 리그)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그건 학생 때나 프로까지 선수 생활을 한 이들이 아직 현역에 남아 있는 친구나 후배 응원하러 가는 거지 축구 그 자체를 즐기려고 가는 것은 아니었다. 호나우두의 스텝오버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스텝오버? 뭐 그걸 그렇게 양키처럼 불러. 그냥 헛다리짚기지. 알 필요 없어, 그런 거. 어차피 우린 안 써”가 나온 대답들 중 그나마 가장 최고치의 관심이었다. 모두들 남이 축구하는 것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가끔 공부 삼아 프로 선수들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수비 라인을 만드는지, 볼 트래핑 자세가 어떤지 등을 참고로 찾아보는 정도였다.

아니, 축구도 잘 안 보고 별로 관심도 없으면서 대체 왜 축구를 시작하게 된 거예요?? 나는 어쩐지 밀려드는 배신감과 금이 간 로망에 치를 떨며 저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고, 돌아오는 답들은 더 맥 빠졌다.

A언니는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오며 가며 얼굴만 익은 할아버지가 대뜸 말을 걸었다고 한다. 가끔 연습시합을 하는 친한 여성축구팀에 사람이 모자란다, 그동안 당신 운동하는 걸 쭉 지켜보니 보통 체력과 운동신경이 아니더라, 한 번 나와서 같이 뛰어보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감독님 전화번호를 건넸고, 원래도 운동을 좋아하고 잘하는 언니라 흥미가 동해 연락을 했고, 첫날 얼결에 시합까지 뛰고 나서 바로 입단을 결정, 8년째 뛰고 있다.

B언니는 A언니가 연예인 길거리 캐스팅처럼 할아버지에게 스카우트 되던 순간에 바로 옆에 있었던 사람인데 “넌 귀가 얇아서 이상한 단체에 잘못 엮여 들어갈 위험이 크니 내가 같이 가주겠다”며 A언니와 동행, 얼결에 같이 시합을 뛰고, 같이 입단했고, 같이 8년 뛰었다.

C언니는 아들을 어린이 축구교실에 데려다주고 데리러가고 하다가 아들의 감독이었던 지금의 감독님을 만났다. 당시 감독님은 학부모들에게 “제가 성인여자 축구팀 감독도 맡고 있는데 와서 한번 꼭 뛰어보세요”라는 제안을 하고 다녔는데, 다들 에둘러 거절하는 와중에 혼자 거절 못하고 진짜로 갔다. 간 날 바로 입단 제안을 받았고 그것도 거절할 수 없었다(언니는 거절할 수 없어서 결혼도 한 사람이다). 그렇게 5년을 뛰었다.

D언니는 C언니와 같은 어린이 축구교실 학부모였는데 처음에는 C언니가 진짜로 가서 입단까지 했다는 사실을 비웃었다가 나중에는 C언니가 감독님이랑 부쩍 친해진 걸 보고 샘나서 입단, 4년을 뛰었다. E언니는 22년 지기인 C언니의 꾐에 넘어가 팀에 들어왔고, 역시 4년을 뛰었다.

F는 한창 다이어트 중 하체살만 유독 안 빠져 고민하고 있었는데 누가 축구를 하면 하체살이 빠진다는 잘못된 정보를 제공, 그날로 애인을 졸라 축구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재미가 붙어 축구팀을 찾다가 입단, 하체살은 빠지지 않았지만(애인은 그녀의 삶에서 빠져나갔다) 7년을 뛰었다.

G는 F의 고등학교 동창인데 몇 명 이상 꼭 참석해야 하는 전국대회 개회식에서 팀원들이 한꺼번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했던 날, 친구 한 명씩 데리고 와서 머릿수 채워달라는 감독님의 애절한 부탁을 받은 F에게 불려나와 개회식에 멀뚱하게 서있다 간 후 얼결에 입단, 4년째 뛰고 있다. H는 지금은 개인사정으로 나오지 않고 있는 어떤 언니에게 똑같은 날 똑같은 이유로 불려나왔다가 역시 4년째 뛰고 있고, 지금 3년째 뛰고 있는 I는 H의 친구고 2년째 뛰고 있는 J언니는 I의 친구다, 헉헉.

# 그녀들이 축구를 만나는 법

프로선수 출신이나 아마추어 리그에서 10년 이상씩 뛰다 온 선수들 빼면 다 이런 식이었다. 게다가 A언니처럼 원래 탁월한 운동신경을 갖고 있다든가 이런저런 운동을 오래 해왔든가 하는 사람은 반도 안 되었고, 심지어 축구팀에 들어오기 전에는 축구룰도 전혀 몰랐다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아니, 다들 몇십 년 동안 축구광으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며 축구를 해야겠다는 열망에 휩싸였다든가, 삶이 공허하고 힘겨웠던 어느 날 길을 걷다 어딘가에서 굴러온 축구공을 무심결에 툭 찼는데 발끝에서 전해지는 짜릿한 전율에 힘이 샘솟으며, 그래, 다시 한 번 제대로 살아 보자!라는 희망이 솟구쳤다든가, 그런 비장한 이유로 축구를 시작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다못해 축구팬을 오래 하다 보니 직접 뛰고 싶었다든지, 모 선수가 “답답하면 니들이 뛰든지”라고 미니홈피에 쓴 걸 보고 열 받아서 시작했다든가, 호나우두의 스텝오버에 반했다 같은 흔해 보이는 이유도 없다니요? ‘그냥 얼결에(모두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얼.결.에!) 아무 운동이나 하게 됐는데 그게 축구였네?’라니. 아 평범해. 아 시시해!

그녀들의 프로축구에 대한 무관심과 축구를 시작한 이유의 다단계스러움과 그렇게 얼결에 시작한 것을 몇 년씩 이어온 요상한 꾸준함에 혼란스러워하던 나는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그날 저녁에 있을 K리그 일정을 확인하고 전날 경기 기사들을 찾아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나를 포함, 대부분의 여자 축구팬들 머릿속 검색창에 ‘축구’를 쳤을 때 뜨는 이미지들은 아마 몇 년도 무슨 경기에서 어떤 선수가 터트린 역전골이라거나, 응원하는 팀이 우승했던 순간, 좋아하는 선수의 안타까운 부상, 이런 것들일 것이다. 반면 남의 축구는 거의 보지 않는 이 ‘축구하는 여자들’ 머릿속에 뜨는 것들은 본인이 넣었던 첫 골, 본인이 경기 중 저지른 뼈아픈 실책, 우리 팀이 역전승하던 날, 우리 팀 유니폼 같은 것들일 것 같다. 그 속에는 오직 나 자신, 내가 속한 팀만이 있다. 어느 프로축구팀의 어느 유명 선수가 끼어들 틈 없이. ‘축구’와 관련해서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경험들로만 꽉 채워져 있는 여자들. 오, 생각해보니 이건 이거대로 멋있잖아?

‘팬’으로 축구를 시작한 나로서는 잘 상상이 안 가는 경험이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빅매치와 내 축구 훈련 시간이 겹친다면 고민 끝에 여전히 전자를 선택할 것 같은 나로서는 온전히 느껴보지 못할 종류의 밀착감일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축구의 많은 면을 만나려고 하는데, 그녀들은 오직 자신과 직접 맞닿는 면을 통해서만 축구를 만난다. 그 우직한 집중. 나와 같이 축구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이렇게 전혀 유별나지도, 신기하지도, 별다른 이유가 있지도 않은 평범한, 하지만 특별한 여자들 사이에 끼어 축구를 한 지 이제 곧 석 달째가 된다. 그동안 인사이드 킥을 배웠고, 드리블을 배웠다. 처음으로 헤딩을 했고 강하게 날아오는 코너킥에 겁 없이 머리를 갖다 대면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축구’라는 단어 뒤에 오직 나만이 주인공인 이미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축구 바깥에 있던 내가 축구 속으로 조금씩 선을 넘어 스텝오버해서 들어가고 있다. 헛다리만은 아니어야 할 텐데.

글=김혼비(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저자)

[저자의 말] 평범한 여자들도 축구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의 곳곳에서 축구에 푹 빠진 여자들이 열렬히 축구를 하고 있다. 해외축구와 K리그를 보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다가 급기야 덜컥 아마추어 여자축구팀에 입단, 지금은 축구를 직접 하며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는 김혼비의 생애 첫 축구도전기이자 축구하는 여자들의 이야기. 피치 위에 더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새겨지기를 바라며.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았던 여자들의 더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곧 단행본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2018년 6월, 민음사)로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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