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풋볼]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 세계적인 축구 스타들도 마찬가지. 현재는 가장 화려한 삶을 살고 있는 스타지만 모두가 꽃길만을 걸어온 것은 아니고, 시련을 이겨내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축구 전문 언론 '인터풋볼'이 준비했다. 꼭지명은 역사를 영어로 한 'HIS-tory'. 즉 그 사람(His)의 이야기(Story)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가 몰랐던 슈퍼스타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들에게 소개한다. [편집자주]

한국 축구의 위기다.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역사를 썼지만 최종예선과 유럽 원정 평가전에서 보여준 경기력은 최악에 가까웠다. 설상가상이다. 유럽 원정 2연전에서 참패를 당한 한국 대표팀은 10월 발표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에서 지난달 51위보다 11계단 하락한 62위에 이름을 올렸다. 공한증을 외치면서 한 수 아래로 평가했던 중국보다 5계단 낮은 순위다. 충격적인 결과로 한국 축구의 자존심이 땅바닥까지 떨어졌다.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그리워지는 이름 석 자가 있다. 바로 한국 축구의 레전드 박지성. 대표팀이 부진한 상황에서 영원한 캡틴 박지성에 대한 그리움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팬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뛴 박지성을 추억하고 있다. 박지성을 기억하는 곳은 한국이 전부는 아니었다.

최근 영국 ‘스카이스포츠’의 축구 해설위원을 맡고 있는 네빌은 아스널과 첼시의 빅 매치를 분석하면서 박지성의 헌신적인 자세를 높게 평가했다. 네빌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빅 매치에서 박지성과 대런 플레처를 기용했다. 두 선수보다 더 뛰어난 선수가 없어서? 아니다. 그들은 경기장에서 열심히 뛰는 자세를 보여줬기 때문이고, 팀에는 규율(조직력)이 필요했다”며 빅 매치에서는 박지성처럼 헌신적인 선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빅 매치에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이며 맨유의 언성 히어로라 불린 박지성. 한국 축구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우리는 다시 이 선수를 주목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이번 ‘정지훈의 HIS-tory'에서는 한국 축구의 영원한 캡틴 박지성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를 독자 여러분들에게 소개한다.

# 키가 작았던 박지성, ‘개구리 보약’과 성장하다

박지성은 수원 산남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축구를 시작했고, 세류초등학교로 전학을 간 후 본격적인 축구 선수로 성장했다. 6학년 때는 전국 대회에서 세류초가 준우승을 차지해 차범근 축구상 장려상을 받았을 정도로 축구 실력을 인정받았고, 발재간과 기술이 좋은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체격이었다. 어린 시절 박지성의 콤플렉스는 신체조건이었고, 가장 큰 문제는 또래보다 한참 작은 키였다.

기술과 체력은 좋았지만 또래보다 키가 작고, 신체조건이 좋지 않아 경기에서 넘어지기 일쑤였다. 안용중학교로 진학해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를 보던 박지성의 잠재력은 충분했지만 신체조건이 문제였다. 이때 박지성의 축구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첫 번째 스승이 나타났다. 바로 수원공고의 이학종 감독이었다. 울산 현대 등에서 활약하며 국가대표까지 발탁됐던 이학종 감독은 키는 작지만 기술과 체력이 좋았던 박지성을 주위에 만류에도 스카우트했다.

시련이 찾아왔다. 이번에도 문제는 체격이었다. 이학종 감독은 기술이 좋은 박지성이 체격과 체력을 보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1년 내내 축구부 훈련에서 제외했다. 박지성은 1년 내내 키와 체격을 키우는 것에 집중했고, 기본기를 집중적으로 연습했다. 이때 정육점을 하던 박지성의 아버지는 몸에 좋은 고기란 고기는 모두 박지성에게 먹였고, 직접 개구리를 구해 약을 만들어 먹였다. 결과적으로 박지성은 2학년에 들어서자 170cm를 넘겼고, 이때부터 박지성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그라운드를 누볐다. 또한, 1년간 익힌 기본기를 통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을 만들었다.

# 무명선수 박지성, 18세에 첫 태극마크를 달다

박지성은 수원공고에서 2학년 때부터 공격형 미드필더로 주전 자리를 꿰찼다. 기술도 좋았고, 무엇보다 기본기가 탄탄했다. 그러나 졸업을 앞둔 박지성을 불러주는 팀은 없었다. 이학종 감독이 대학과 프로팀을 돌아다니며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체격이 너무 작다’였다. 어린 시절부터 박지성을 괴롭히던 체격 문제가 성인무대를 앞두고도 문제가 됐고, K리그 입단을 위해 수원 삼성 2군 테스트를 받기도 했지만 불합격이었다.

시련 끝에 기회가 오는 법. 박지성을 원하는 곳은 명지대였다. 당시 명지대는 10명의 신입 선수를 선발할 계획이었는데 입학하기로 했던 선수가 다른 곳으로 가 한 자리가 생겼고, 이학종 감독의 적극 추전으로 김희태 감독이 이끌던 명지대에 입학하게 됐다.

박지성의 새로운 축구 인생이 시작됐다. 이학종 감독으로부터 기본기를 배웠다면 김희태 감독으로부터는 체력과 승부근성을 배웠다. 지금의 박지성을 완성시킨 기본기, 기술, 체력, 승부근성이 모두 이때 나온 셈이다.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단거리 왕복달리기를 연습해온 박지성은 이미 명지대에서도 강철 체력을 자랑했다.

결국 기회가 찾아왔다. 1999년 1월, 허정무 감독이 이끌던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은 울산에서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명지대와 친선경기가 잡혀있었다. 당시 김희태 감독 밑에서 주전으로 기회를 받던 박지성도 당연히 경기에 출전했고, 청소년 대표 시절 우러러보던 김도균, 박진섭 등과 맞대결을 펼쳤다. 당시 박지성은 올림픽 대표팀과 비교했을 때 힘과 체력에서 부족하다고 느꼈지만 허정무 감독은 박지성의 기술, 수비, 체력, 기본기 등을 높게 평가했고, 결국 무명선수였던 박지성은 18세의 나이로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 K리그가 외면한 박지성, 교토의 별이 되다

올림픽 대표로 선발된 박지성의 성장 속도는 엄청났다. 박지성이 올림픽 대표로 뽑힌 나이는 18세였고, 올림픽 대표팀에는 박지성보다 최소 두 살은 많은 선배들과 경쟁해야 했다. 그러나 박지성은 좌우 윙백, 수비형 미드필더 등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며 차츰 주전으로 자리 잡았고, 허정무 감독의 눈도장을 확실하게 받았다. 훗날 명지대의 김희태 감독은 “박지성은 하루하루가 다른 선수다”라고 평가했고, 허정무 감독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박지성은 한국 대표로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했다. 당시 한국 올림픽 대표팀은 스페인에 0-3으로 패배했지만 이후 모로코와 칠레를 1-0으로 잡으며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다. 그러나 스페인에 대패한 것이 타격이 컸고, 예선에서 탈락했다. 비록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박지성의 성장세는 눈부셨고, 이후부터 꾸준하게 국가 대표팀에 발탁되며 주가를 높였다.

사실 우리는 박지성을 노력형 선수라고 부르는 게 익숙하지만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말이다. 분명 엄청난 노력으로 세계적인 선수가 됐지만 사실 박지성이 올림픽 대표로 선발되고, 국가대표로 선발되는 과정을 보면 박지성은 재능이 탁월한 선수이기도 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박지성의 탁월한 재능을 알아본 것은 일본 J리그였다. 이미 19세의 나이로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던 박지성에게 러브콜을 보낸 곳은 일본 J리그 시미즈 S펄스와 교토 퍼플상가였다. K리그에서 외면 받았던 박지성의 선택은 J리그였고, 2000년 연봉 5천만 엔(명지대에 발전 기금 1억 원도 지급)을 받는 조건으로 교토에 입단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국의 유명 스타가 아닌 박지성을 선택한 것을 두고 많은 이야기가 나왔지만 교토의 믿음은 확고했다.

박지성은 교토에서 승승장구했다. 첫 시즌부터 교토의 주전으로 자리 잡은 박지성은 특유의 성실함을 바탕으로 일본 동료들과도 친하게 지냈고, 경기장에서는 자신의 장점을 십분 발휘했다. 여기에 박지성의 투지와 체력이 기술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J리그와 만나 시너지 효과를 냈고, 박지성을 빠르게 성장했다. 결과도 따라왔다. 박지성은 두 번째 시즌 38경기에 출전해 3골을 기록했고, 교토의 1부 리그 승격을 이끌었다. 여기에 마지막 시즌에는 부상이 있었지만 출전을 강행해 골까지 성공시키며 일왕배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 2002 월드컵 4강 신화, ‘평생의 은사’ 히딩크를 만나다

박지성은 18세의 나이로 처음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되며 태극마크를 달았고, 이후 자연스레 A대표팀 발탁으로 이어졌다. 이미 실력은 급성장해있었다. 박지성은 2000년 4월 5일, 아시안컵 예선 라오스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고, 이후 꾸준하게 국가대표와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박지성은 2001년 1월 울산 전지훈련에서 평생의 은사 거스 히딩크 감독을 만났다.

박지성은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히딩크 감독과 만남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적어도 인생을 바꿀 만한 기회가 세 번쯤 온다고 한다. 정말 그렇다면 히딩크 감독과의 만남이 그런 것 아닐까.’ 그만큼 박지성에게 히딩크 감독과 만남은 운명이었고, 인생을 바꿀만한 전환점이 됐다.

당시 히딩크 감독은 2002 한일 월드컵 본선을 1년 8개월 앞둔 상황에서 한국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고, 기술위원회의 추천을 받아 박지성을 포함한 30명이 넘는 선수들을 테스트했다. 이때 박지성은 혹한으로 꽁꽁 얼어붙은 그라운드를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고, 공을 뺏기 위해 태클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때 히딩크 감독은 후보군인 B팀에 속했던 박지성의 정신력을 높이 평가했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대표팀에 불러 자신감을 심어줬다. 특히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이 훗날 세계적인 무대에서 뛸 자질과 정신력을 갖췄다고 평가했고, 언젠간 잉글랜드 같은 큰 무대에서 뛸 것이라 예언했다.(결국 박지성은 프리미어리그 최고 명문 맨유에서 뛰었다)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과 함께 급성장했다. 박지성의 진가는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잉글랜드와 프랑스와 평가전에서 나왔다. 박지성은 두 경기 모두 출전해 2골을 기록했는데 특히 1년 전 0-5 참패의 굴욕을 안겨줬던 프랑스전에서 환상적인 선제골을 기록하며 축구 팬들에게 자신의 이름 석 자를 각인시켰다.

2002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박지성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루는 동안 전 경기에 출전했고, 포르투갈전에서는 환상적인 결승골까지 터뜨렸다. 이후 박지성은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감격의 포옹을 나눴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결과적으로 박지성은 월드컵 이후 히딩크 감독과 함께 네덜란드 명문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했고, 박지성의 유럽 진출의 꿈이 이뤄졌다.

# 시련을 극복한 박지성, ‘명장’ 퍼거슨의 부름을 받다

유럽 진출의 꿈을 이뤘지만 달콤하지는 않았다. 박지성은 월드컵 이후 소속팀과 대표팀을 오가며 무리한 출전을 감행했고, 결국 부상으로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당시 박지성은 혹사로 인해 무릎 연골이 찢어졌고, 결국 수술을 받았다) 이런 이유로 박지성의 PSV 에인트호번 첫 시즌과 두 번째 시즌은 최악이었고, 홈팬들의 야유를 받기도 했다. 여기에 팀 동료인 마르크 판 봄멜은 공개적으로 박지성을 비난하기도 했고, 홈팬들의 야유는 더욱 거세졌다. 이에 히딩크 감독은 박지성을 배려해 원정 경기에만 주로 투입했고, 박지성은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홈팬들의 야유는 더욱 거세졌다. 훗날 박지성은 홈팬들의 야유에 섭섭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날 때도 있었다고 전했고, ‘언젠가 저 야유를 나를 향한 환호로 바꿔놓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기회가 왔다. 박지성은 일본 J리그의 뜨거운 러브콜을 거절하고, PSV에 남았는데 이때가 2004-05시즌이었다.

전설의 시작. 포지션 경쟁자였던 아르연 로벤이 첼시로 떠난 뒤 박지성이 주전 기회를 잡았다. 결국 박지성은 이 시즌 맹활약하며 홈팬들의 야유를 환호로 바꿨고, 특히 AC밀란과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서 환상적인 선제골을 터뜨리며 3-1 승리를 이끌었다. 비록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박지성의 이름을 전 유럽에 알릴 수 있었고, 홈팬들도 ‘위숭빠르크(박지성 응원가)’를 뜨겁게 불렀다. 박지성은 이때를 기억하며 유럽 진출 이후 가장 짜릿한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박지성 축구 인생에서 월드컵 4강 신화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박지성은 2004-05시즌 리그 우승,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 컵대회 우승까지 이뤄냈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이때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컵대회 우승에 기뻐하던 박지성은 에이전트를 통해 맨유 이적 소식을 접했다. 당시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이 AC밀란전 활약상을 지켜봤고, 꾸준히 관심을 보낸 끝에 좋은 조건으로 러브콜을 보냈다.

특히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맨유 이적을 설득했다. 박지성에게는 엄청난 기회였다. 그러나 박지성은 ‘은사’ 히딩크 감독을 떠올렸고, 힘들었던 시절 자신을 믿어준 히딩크 감독과 팬들을 배신하고 싶지 않았다. 이에 박지성은 대표팀 경기이후 히딩크 감독과 상의했고, 결국 허락을 받아 맨유로 이적했다.

박지성은 2005년 6월 22일 맨유와 정식 계약했다. 등번호는 13번이었다. 이후부터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박지성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라이언 긱스, 웨인 루니 등 세계적인 선수들과 함께 최고의 활약을 펼쳤고, 특히 공격적인 호날두와 짝을 이뤄 맨유의 측면을 책임졌다. 이때 박지성은 자신의 장점인 활동량, 공간 창출 능력, 스피드, 축구 지능 등을 활용해 맨유의 주전급 선수로 활약했고, 7년 동안 맨유에서 활약하며 리그 우승 4회, 리그 준우승 3회, FA컵 준우승, 리그컵 우승 3회, 챔피언스리그 우승, 챔피언스리그 준우승 2회 등 엄청난 커리어를 쌓으며 아시아 최초의 길을 걸었다.

# 한국 축구 위기의 순간, 항상 ‘캡틴’ 박지성이 있었다

한국 축구의 위기다. 이처럼 대표팀이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던 때가 있었는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국민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 단 하나다. “졌지만 잘 싸웠다. 선수들은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모습을 보여줬다. 후회는 없다” 이 말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 경기력을 원한다. 이쯤 되면 그리워지는 이름이 있다. 바로 박지성이다.

한국 축구가 위기에 빠진 순간 언제나 박지성이 있었다. 2000년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발탁된 박지성은 2002 한일 월드컵, 2006 독일 월드컵,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했고, 항상 최고의 모습을 보였다. 특히 2002 한일 월드컵 포르투갈과의 조별리그 3차전, 2006 독일 월드컵 프랑스와 조별리그 2차전, 2010 남아공 월드컵 그리스와 조별리그 1차전에서 득점포를 가동하며 월드컵 3개 대회 연속골을 기록하며 아시아인 최초 본선 3회 연속 골 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안정환이 가지고 있던 본선 최다 골(3골) 타이기록도 세웠다. 여기에 박지성은 2002 월드컵 포르투갈전, 2006 월드컵 프랑스전, 2010 월드컵 그리스전과 나이지리아전에서 맨 오브 더 매치(Man of the match)에 선정되며 최초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또한, 박지성은 2011년 AFC 아시안컵 4강 일본전에서 박지성은 자신의 A매치 100번째 출장 기록을 달성, 대한민국 선수 중 역대 8번째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한 선수가 됐다.

기억나는 것은 또 있다. 박지성은 2008년 10월 김남일의 뒤를 이어 대표팀의 주장직을 맡았고, 2010년 5월 24일 일본 사이타마에서 펼쳐진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단독 드리블 후 득점포를 가동했다. 이후 박지성은 ‘산책 세리머니’를 펼치며 일본의 출정식을 망쳤다. 여기에 이란과의 두 번의 경기에서 득점포를 가동하며 ‘천적’ 이란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준 것도 국민들의 가슴 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이처럼 박지성은 한국 축구가 위기에 빠진 순간 어김없이 등장했다. 현 대표팀이 부진한 경기력과 대한축구협회의 여러 문제로 조롱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박지성의 향수가 더 짙어지는 이유고, 그와의 추억이 더 그리워지는 이유다.

# ‘한국 축구의 전설’ 박지성, 영광의 순간 TOP10

*2002년 한일 월드컵 포르투갈전 결승골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팬들이 뽑은 ‘2002년 최고의 골’이다. 한국은 루이스 피구 등이 뛰고 있었던 유럽의 강호 포르투갈을 상대로 인상적인 경기력을 보이며 1-0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박지성이 있었다. 박지성은 후반 25분 이영표의 크로스를 가슴으로 받아 멋진 트래핑으로 수비를 제친 후 포르투갈의 골망을 흔들며 한국에 16강행 티켓을 선물했다.

*한국인 최초 챔피언스리그 본선 득점

2004-05시즌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상대는 전통의 강호 AC밀란이었다. 당시 박지성이 뛰고 있는 PSV에인트호번은 밀란과 원정 1차전에서 0-2 완패를 당했고, 결승 진출 가능성이 희박해보였다. 이때 박지성이 환상적인 선제골을 터뜨렸고, PSV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비록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결승 진출은 좌절됐지만 박지성은 PSV 팬들의 야유를 환호로 바꿔놓았고, 이 골은 챔피언스리그 본선 한국인 최초의 득점이었다.

*한국인 최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챔피언스리그에서 맹활약한 박지성의 진가를 알아본 인물은 ‘명장’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었다. 결국 박지성은 2005년 6월 22일 맨유와 계약을 체결했고, 7월 14일에 공식 입단식을 가졌다. 등번호는 13번. 당시 박지성이 맨유의 유니폼을 들고 퍼거슨 감독과 찍은 사진이 나오자 국내에서는 합성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후 박지성은 2005년 8월 13일 에버턴과의 프리미어리그 원정 경기에서 데뷔했고, 12월 21일 버밍엄 시티와 리그컵에서 데뷔골을 터뜨렸다. 그리고 2006년 아스널전에서 프리미어리그 데뷔골을 신고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프랑스전 동점골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막내였던 박지성이 세계 최고의 클럽 맨유의 주축 선수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 월드컵이었다. 당시 박지성은 에이스를 상징하는 등번호 7번을 달고 맹활약을 펼쳤다. 비록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박지성은 ‘아트사커’ 프랑스를 상대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동점골까지 기록했다. 프랑스전 득점으로 박지성은 월드컵 2연속 득점 기록을 세우게 됐고, 경기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아시아 최초 프리미어리그 3연패

아시아 최초의 프리미어리그 우승 경험은 일본의 이나모토 준이치다. 그러나 당시 이나모토는 아스널 소속이었지만 리그에서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고, 우승 메달을 받지 못했다. 박지성은 달랐다. 2006-07시즌 부상으로 수술했음에도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결국 우승 메달을 받았다. 이후 박지성은 2007-08시즌, 2008-09시즌 우승까지 차지하며 아시아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맨유의 주축 선수로 자리 잡았다.

*2009년 아시아 선수 최초 챔피언스리그 결승 출전

챔피언스리그는 ‘별들의 잔치’, ‘꿈의 무대’라 불린다. 그만큼 축구 선수들에게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 뛰는 것은 꿈같은 일이고, 결승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역사가 이뤄졌다. 한 번의 아픔이 있었다. 박지성은 2007-08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서 맹활약하며 맨유를 결승전으로 이끌었지만 퍼거슨 감독의 파격적인 라인업으로 인해 명단에서 제외됐다. 이때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을 뺀 것을 두고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 중 하나였다’고 했고, 박지성은 이를 악물었다. 결국 꿈을 이뤄냈다. 박지성은 다음 시즌에도 맹활약하며 맨유의 결승 진출에 기여했고, 바르셀로나와 결승전에서 선발 출전했다.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아시아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무대를 밟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2009-10시즌 챔피언스리그 16강 AC밀란전 맹활약

‘수비형 윙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한 마디로 박지성의 전성기였다. 왕성한 활동량, 강력한 수비력, 축구 지능을 앞세운 박지성은 맨유의 주전급 선수로 활약했고, 2009-10시즌 챔피언스리그 무대에서도 맹활약했다. 특히 AC밀란과 16강 2차전에서는 에이스 안드레아 피를로를 전담 마크하며 AC밀란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해냈고, 팀의 세 번째 골까지 넣으며 4-0 승리의 주역이 됐다. 이후 피를로는 박지성을 퍼거슨의 경비견이라고 표현했고, 잠시 논란이 됐지만 이 말은 비난이 아닌 최고의 찬사라는 것이 알려졌다. 그만큼 피를로도 박지성의 실력을 인정한 것이다.

*일본의 출정식 망친 박지성의 ‘산책 세리머니’

2010년 5월 24일 일본 사이타마. 이날은 남아공 월드컵을 앞둔 일본 대표팀의 출정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일본은 월드컵 본선을 앞둔 상황에서 자신감이 넘쳤고, 한국을 제물로 완벽한 출정식을 연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한국의 2-0 승. 특히 박지성은 환상적인 개인기술로 선제골을 기록한 후 산책 세리머니를 펼쳤고, 일본 축구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한국 축구 역사 명장면 중 하나인데 일본으로선 지우고 싶은 기억의 하나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그리스전 쐐기골

박지성의 마지막 월드컵은 해피엔딩이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원정 16강에 진출했고, 자신도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대표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특히 박지성은 첫 경기 그리스전서 팀의 두 번째 득점에 성공하며 2-0 승리를 이끌어 한국의 원정 월드컵 16강 진출을 견인했다. 그리스전 득점으로 박지성은 월드컵 3연속 득점이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맨유 통산 200경기 출장, 아시아 최초 EPL 주장

2012년 2월 6일, 박지성은 첼시와의 리그 23라운드에서 후반 40분경 대니 웰벡과 교체 투입되어 맨유 통산 200경기 출전을 달성했다. 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92번째 기록이며, 아시아인으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또한 그는 2012년 2월 24일, 아약스와의 유로파리그 32강전에서는 맨유 입단 후 최초로 선발주장 완장을 차고 경기에 나섰다. 이 시즌을 끝으로 맨유와 작별한 박지성은 7시즌 동안 총 205경기 출전, 통산 27득점을 기록하였다. 여기에 박지성은 퀸즈 파크 레인저스로 이적해 아시아 선수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주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 전설이 된 박지성의 커리어

-우승 경력

교토 퍼플상가(2000~2002): J리그 디비전 2 우승(2001), 천황배 우승(2002)

PSV 에인트호번(2002~2005): 리그 우승(2002-03, 2004-05), KNVB컵(2004-05), 요한 크루이프 실드(200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2005~2012): 리그(2006-07, 2007-08, 2008-09, 2010-11), 리그 컵(2005-06, 2008-09, 2009-10), 커뮤니티 실드(2007, 2008, 2009, 2011), 챔피언스리그(2007-08), FIFA 클럽 월드컵(2008)

-한국 대표팀 경력(2000~2011, 100경기 13골)

2000년 AFC 아시안컵 3위

2002년 FIFA 월드컵 4위

2002년 아시안 게임 축구 동메달

2010년 FIFA 월드컵 16강

2011년 AFC 아시안컵 3위

-개인 수상 경력

2002년 FIFA 월드컵 맨 오브 더 매치: 포르투갈전(조별리그)

2002년 체육훈장 맹호장

2003년 피스컵 골든볼

2004-05 KNVB컵 MVP

2004–05 에레디비시 베스트 XI

2006년 FIFA 월드컵 맨 오브 더 매치: 프랑스전

2007년 FIFA 선정 아시아 최고의 선수상

2010년 FIFA 월드컵 맨 오브 더 매치: 그리스전, 나이지리아전(조별리그)

2010년 대한축구협회 올해의 선수상

2011년 AFC 아시안컵 맨 오브 더 매치:호주전(조별리그)

2011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선정 올해의 해외파 선수상

글=정지훈 기자

사진=게티 이미지, 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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