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풋볼] 2012년은 제주유나이티드가 창단된 지 꼬박 30년이 되는 해다. 프로축구 출범이 임박했던 1982년 12월 유공 코끼리라는 이름으로 탄생했다. 국내 프로축구팀 1호는 할렐루야지만 지금은 내셔널리그팀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제주유나이티드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프로구단이다. 는 그동안 수 많은 축구 스타를 배출하고 한국 축구의 저변 확대에 힘을 써온 제주유나이티드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는 코너다.

'아! 골, 골, 골이에요~!' 화려한 입담과 전문적인 식견이 깃든 축구 해설로 커다란 인기를 끌었던 신문선(54). 하지만 신문선이 한때 촉망 받는 축구선수이자 유공 코끼리 축구단의 간판스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축구계의 '엘리트 코스'를 두루 거친 신문선은 슈퍼리그가 첫 기치를 올렸던 1983년 유공 축구단의 창단 멤버로 합류했다. 통산 64경기에 나서 3골 4도움의 기록을 남겼다. 공격포인트는 적었지만 강력한 카리스마와 포지션을 가리지 않는 전천후 플레이로 축구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신문선은 1985년 겨울 홀연히 그라운드를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 선수로서 한창때였다. 그래서 팬들의 놀라움과 아쉬움은 더 컸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걸까. 지금은 마이크를 쥐고 경기를 해설하는 장면이 더 친숙한 '축구선수' 신문선을 만나 그때 못다 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 만나서 반갑다. 해설위원 신문선은 알아도 축구선수 신문선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학창시절부터 축구선수로서 두각을 나타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고교 시절 '체육고등학교의 펠레'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전국에서 랭킹 1, 2위를 다투는 선수였다. 당시 포지션이 라이트 윙이었는데 득점왕도 타고 말 그대로 펄펄 날던 때였다. 이후 연세대, 국가대표팀, 그리고 유공 축구단에서 프로생활까지 경험했으니 어떤 의미에선 난 참 복 받은 선수였다.

- 유공 축구단 창단 멤버로 1983년 슈퍼리그 원년대회부터 뛰었다. 당시 추억을 회상한다면?

국내 프로축구팀 1호는 할렐루야지만 유공 축구단은 당시 최고의 팀이었다.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모두 모였고 지금까지 국내 최고(最古)의 프로축구단이라는 자긍심을 느낄 정도로 유공 축구단이라는 이름이 주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 1984년 정규리그 28경기에 모두 출전하며 팀의 주축 선수로서 입지를 단단히 했다. 하지만 그 해 우승의 문턱에서 라이벌 대우에 패하고 말았는데?

아마도 전 경기에 출전한 걸로 알고 있다. 윙어, 풀백, 미드필더 등 팀이 원하면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뛰었다. 현대축구로 보자면 멀티플레이어였다. 1984년은 나뿐만 아니라 유공 축구단에 있어서 아쉬운 한 해였다. 전반기 우승을 차지했는데 후반기 들어 페이스를 잃었다. 결국 챔피언결정전에서 맞수였던 대우에 밀려 우승컵을 놓치고 말았다. 만약 전후반기 없이 풀리그로 진행됐다면, 시즌 초반의 여세를 몰아 정상에 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 1985년 12월 27세의 나이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부상도 없었고 축구 선수로서 정점을 달리고 있었는데 무슨 이유로 갑작스레 그라운드를 떠났나?

소위 잘 나가고 있었고 수입도 괜찮았다. 하지만 축구화를 벗고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당시 내 목표는 대학원을 졸업하면 대학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수생활과 학업을 병행하는 게 쉽지 않았다. 재학 중이었던 연세대 교육대학원이 만만한 곳도 아니었고, 1986년 졸업학기가 되면서 졸업 논문을 써야했는데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학업에 매진하기 위해 1985년 12월 전격적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 당시 결정을 후회하지 않나. 주위의 반대가 컸을 텐데?

몇 달간 고심했기에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주위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특히 부모님의 반대가 극심했다. 가장 꽃다운 나이에 축구를 왜 관두느냐고. 그때 가장 큰 힘이 됐던 사람이 바로 아내였다. 아내가 나보다 대학원을 먼저 졸업하고 교직에 있었는데, 내가 정말 교편을 잡고 싶은 꿈이 있다면 유니폼을 벗어도 좋다고 힘을 실어주었다. 그래서 현역생활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은퇴를 선언할 수 있었다.

- 유공 축구단과 오랫동안 함께하지 않았지만 친정팀에 대한 애정은 남다른 걸로 알고 있다.

유공 축구단 OB 모임에 나가면 옛 동료와 구단 관계자들이 아직도 나를 두고 유공 축구단의 상징 선수라고 말한다. 현역시절 유공 축구단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쓴소리를 마다치 않았다. 사장실에 불려 가 꾸지람을 들을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OB 모임에 나가면 첫 인사말을 내가 늘 한다. (웃음) 유공 축구단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유공 축구단은 내 축구인생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평소 주유할 때도 SK 주유소만 이용할 정도로 친정팀에 대한 나의 애정은 남다르다. (웃음)

- 유공 축구단의 후배격인 제주유나이티드의 모습을 보면 어떠한 생각이 드는가?

역사와 성적 그리고 인기가 수반되어야 명문 클럽이 될 수 있다. 최근 제주유나이티드를 바라보면 그 가능성을 느낄 수 있다. 특출한 스타도 없고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을 갖고 있음에도 특유의 축구색깔을 갖고 강팀으로 변모하고 있는 게 흥미롭다. 홈 관중 수치도 점차 증가하고 있지 않은가. 올해 팀 창단 30주년을 맞아 명가 재건을 선언한 것으로 아는 데 선배이자 축구인으로서 기대가 크다.

- 짧은 프로생활, 대기업 마케팅 부장, 축구협회 이사, 방송해설과 교수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아왔다. 그 동안의 발자취를 되돌아 본다면?

선수로 뛰던 20년이 전반전이었다면 해설자로 보낸 20여 년은 후반전이었다. 그리고 교직에 서 있는 지금이 바로 연장전이라 생각한다. 축구선수 출신으로서 교수가 되기가 싶지 않았지만, 나의 발자취가 한국 축구에 가치 있는 일이 되길 바라고 후배들에게도 하나의 이정표가 됐으면 좋겠다. 앞으로 내 인생의 경기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스스로 평가를 했을 때 내 자신이 만족스러울 정도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

-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한 마디 남긴다면?

신문선에 대한 캐릭터는 분명한 것 같다. 현역시절 때부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내 길을 걷고 있는 게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지 않나 싶다. 앞으로도 어느 자리에 있든 한국 축구가 더욱 건강할 수 있도록 끝까지 힘쓰도록 하겠다.

인터뷰=이경헌 에디터

사진=제주유나이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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