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풋볼] 서재원 기자 = 한국 선수들의 활약으로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그러나 우리가 EPL을 볼 수 있는 부분은 TV 위성 중계에 잡힌 모습이 전부다. 두 시즌동안 모 일간지 EPL 현지 통신원 역할을 수행한 필자의 경험을 통해, TV에서는 볼 수 없는 EPL 뒷이야기를 매주 '서재원의 EPL通'에서 풀어내고자 한다.[편집자주]

12년 만에 리그 우승이란 꿈을 꿨지만, 이제 쉽지 않아 보인다. 아스널과 아르센 벵거 감독의 이야기다. 팬들은 또 다시 벵거 감독의 퇴진운동을 벌이고 있다.

매번 기대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누군가는 ‘과학’이라고도 한다. 아스널은 지난 5일(한국시간) 런던의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열린 2015-16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 29라운드 토트넘 핫스퍼와의 북런던더비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했고, 승점 52점으로 리그 3위를 유지했다. 리그 종료까지 9경기가 남았고, 선두 레스터 시티(승점 60점)와의 격차는 8점으로 벌어졌다. 현재 흐름상으론 역전 우승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한 달 사이에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지난달 14일 홈에서 선두 레스터를 꺾을 때만해도 아스널은 기세등등했다. 허나, 이어진 리그 3경기가 문제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원정에서 충격적인 패배를 당한 뒤, 스완지 시티와의 홈경기에서 무기력하게 패했다. 오히려 토트넘과의 북런던더비에서 무승부를 거둔 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승점을 최대 9점 획득할 수 있는 기회에서 1점만을 획득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겠지만, 만약 아스널이 이 3경기를 다 잡았다면 아스널은 현재 레스터와 승점이 같았을 것이다.

이에 아스널 팬들이 다시 들고 일어났다. 지난 9일 치러진 헐시티와의 FA컵 16강 재경기에서 원정 응원을 온 일부 아스널의 팬들이 벵거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배너를 들었다. 이 배너엔 ‘아르센, 추억은 고맙지만 이제는 작별해야할 때다(Arsene, thanks for the memories but its time to say goodbye)’라는 문구가 적혀있었고, 벵거 감독의 퇴진을 외쳤다.

# 전혀 새롭지 않은 ‘벵거 퇴진 운동’

사실 ‘벵거 감독 퇴진 운동’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필자가 영국에서 통신원 활동을 했던 시기에도(2012-13, 2013-14시즌) 비슷한 일은 종종 있었다.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벵거 감독은 1996년부터 아스널을 이끌었고, 어쩌면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전 감독 다음으로 EPL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EPL 초기, 퍼거슨 감독이 이끌던 맨유의 독주를 막았고, 20년 동안 아스널이 꾸준한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데는 벵거 감독의 능력을 배재하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벵거 감독을 바라보는 현지 팬들의 시선은 상당히 차가웠다. 벵거 감독의 퇴진을 외치는 아스널의 팬들은 항상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에 있었고, 그들은 종종 경기 전, 경기장 밖에서도 그들의 목소리를 냈다. 팬들의 비판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벵거 감독의 1000번째 경기를 기념하는 행사가 진행됐던 경기(2013-14 32라운드 스완지전, 당시 1000번째 경기는 첼시 원정에서 치러졌다)에서도 계속됐다.

‘벵거 감독 퇴진 운동’은 필자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때문에 당시 아스널 팬의 목소리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고, 우연치 않은 기회에 아스널의 한 골수팬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필자의 집이 있었던 북런던의 골더스그린 지역엔 아스널 팬들이 다수 거주했고,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할 시 탔던 210번 버스에서 아스널 팬들과 자주 마주했다. 스완지전이 끝나고, 여느 때와 같이 버스를 타고 귀가하는데 한 아스널 노년 팬이 말을 걸어왔다. 동양인 꼬마(영국인들 눈에 동양인은 상당히 어려보인다고 한다)가 미디어증을 목에 걸고 있으니 신기해 보였나보다. 필자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에게 ‘벵거 퇴진 운동’에 대해 물었고, 그는 매우 진지하게 답을 해줬다.

물론 영국식 발음이 강했던 그의 말을 100% 알아듣진 못했다. 다만 그가 강조했던 내용은 “벵거 감독은 이제 물러나야 한다. 그에게서 더 이상 밝은 미래를 볼 수 없다. 그는 소심하고, 변화를 두려워한다. 아스널이 우승하려면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였다. 물론 그의 의견이 아스널 팬 전체의 입장을 대변할 순 없지만, 벵거 감독의 퇴진을 원하는 팬들 대다수는 ‘변화’를 원했다.

# 아스널 팬들은 ‘조롱’을 원치 않는다

당시 이 노년 팬과의 대화를 기사화하진 못했다. 취재에서 가장 중요했던, 취재원의 정보를 얻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는 필자에게 끝내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고, 자신의 말이 기사화되길 원치도 않아했다.

그가 ‘기사화’를 원치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아스널이 더 이상 조롱의 대상이 되길 원치 않아했다. 그는 “가장 슬픈 것은 내가 사랑하는 팀이 놀림감이 된다는 것이다. 무리뉴 감독에게 무시당하는 벵거 감독으로 아스널이 EPL 전체의 조롱을 받고 있다”며 “이것도 벵거 감독이 물러났으면 하는 이유 중 하나다”고 말했다.

실제로 필자가 통신원으로 활동했던 당시, 벵거 감독은 현지 언론의 엄청난 조롱을 받고 있을 때였다. 무리뉴 감독과의 언쟁을 비롯해 우리에게도 유명했던 ‘지퍼 사건’이 연일 화제를 모을 때였다. 당시 기자석에선 벵거 감독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기사화됐었다.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도 다른 경기장과는 사뭇 달랐다. 현지 기자들은 벵거 감독에게 보다 날카롭게 질문했고, 무리뉴 감독, 퇴진 운동 등 경기 외적인 질문도 서슴지 않았다. 하나 확실한 점은 퍼거슨 전 감독을 대하는 현지 기자들의 태도와 벵거 감독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랐다는 것이고, 그 차이는 ‘존중’의 유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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